
어느덧 이직한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 작년 퇴사를 준비할 때는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한 챕터를 마무리하면서 그보다 정확한 위로가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반대로 쓴다. 좋았다면 경험이고, 나빴다면 추억이다.
스타트업에서 여러 역할을 거치는 동안 잘못된 의사결정도, 운 좋게 맞아떨어진 순간도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머리에 남느냐면, 아픈 기억일수록 더 오래 곱씹게 된다. 회고록을 쓴다면 실패한 장면 10가지가 먼저 나올 것이다.
돌아보면, 정작 다음 챕터에서 내게 도움이 된 건 반대쪽이었다.
과거에 광고 플랫폼으로 제품을 피벗하느라 TF를 맡은 적이 있다. 매일 새벽까지 코드를 썼고, 그렇게 만든 플랫폼이 이후 회사의 메인 성장 동력이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걸 “힘들었지만 좋은 시절”로 기억했다. 운이 좋았고, 타이밍이 맞았고, 무엇보다 좋은 동료와 함께 노력했으니까.
운도 타이밍도 사람도 다시 가져올 수 없고, 노력은 다시 쏟더라도 같은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다. 추억으로 두면 딱 거기서 끝이다.
한참이 지나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 시절의 한 장면이 새 프로젝트의 성공과 맞닿는 순간을 만났다. 어느 날의 결정, 어느 줄의 코드, 어느 고객의 한마디. 그 하나를 떼어내 다시 묻는다. 왜 그 순서였는지, 그때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는지.
“좋은 시절”이라는 한 단어로 묶어 둔 자리에서 구조가 드러날 때, 추억은 비로소 성장할 수 있는 경험으로 각색된다.
반대로 그 시절의 실패도 같은 방식으로 떼어낼 수 있었다. 어느 날의 잘못된 결정, 어느 회의에서 놓친 신호, 어느 고객이 떠난 이유. 그 하나를 다시 묻는다. 왜 그렇게 흘러갔는지, 그때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무엇이 그것을 막지 못했는지.
아무리 정직하게 들여다봐도, 내 경우에는 거기서 다음에 이건 하지 말자는 목록만 나왔다. 같은 함정을 다시 안 밟게 해 주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거기서 나오지 않았다. 좋은 기억의 해부가 덧셈이라면, 나쁜 기억의 해부는 뺄셈이다.
이건 개발자가 테스트를 쌓아 가는 방식과 비슷하다. 내가 본 코드베이스에서 성공 경로 테스트는 처음에 한 번 쓰이고 그 뒤로는 좀처럼 손대지 않았다. 장애가 날 때마다 예외 처리와 방어 코드와 그것을 검증하는 테스트만 쌓여 갔다. 그런데 프로덕션에서 매일 통과해야 하는 건 성공 경로다. 사용자가 매일 지나가는 길이자 비즈니스가 굴러가는 단 하나의 흐름이고, 이 경로가 살아 있어야 제품의 가치가 만들어진다.
나빴던 일의 해부는 장애 뒤에 보태는 회귀 테스트에 가깝다.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제품이 전진하지 않는다. 좋았던 일의 해부는 성공 경로 테스트와 같아서, 이 경로를 의도적으로 재현할 수 있어야 다음 챕터에서도 같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좋았던 장면을 자꾸 흘려보낸다. 성공 경로는 잘 굴러가니 손댈 필요가 없고, 시급한 문제는 실패 경로 쪽이라고 쉽게 믿어 버린다. 그래서 내가 거친 회고 대부분에는 하지 말아야 할 목록만 쌓였고, 반드시 다시 통과해야 하는 경로는 적힌 적이 없다.
비슷한 시기에 박소령 대표의 『실패를 통과하는 일』을 읽었다. 퍼블리 10년의 잘못된 의사결정 10가지를 정면으로 해부한 책이다. 아픈 장면을 그렇게 꺼내 들여다보는 용기는 드물고 귀하다.
이런 책이 있어야 같은 함정에 다시 빠지는 사람이 줄어든다. 다만 우리가 더 자주 해야 할 일은 그 반대편에 있다. 좋았던 10가지 장면을 똑같은 깊이로 해부하는 일.
그래서 요즘은 이렇게 다시 쓴다. 좋았던 건 들여다보고, 나빴던 건 흘려보내자. 실패는 통과하는 것이고, 성공은 재현하는 것이다.
#참고 자료
- 『실패를 통과하는 일』, 박소령. 퍼블리 10년의 잘못된 의사결정 10가지를 해부한 책이다.
-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애니 듀크. 결과만 보고 의사결정의 질을 판단하는 편향을 리설팅이라 부르고, 포커의 확률적 사고로 그 편향을 다룬다.
- 『하이 아웃풋 매니지먼트』, 앤디 그로브. 작은 입력이 큰 출력으로 증폭되는 활동에 시간을 쓰라는 관리 레버리지를 설명한다. 좋았던 한 번의 성공 패턴을 해부해 다음에서 재현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레버리지가 큰 회고다.
- 『The Score Takes Care of Itself』, 빌 월시. 탁월함이 어떤 모습인지를 매뉴얼로 새겨 두는 수행 기준으로 49ers를 명문 팀으로 만든 이야기다. 성공 경로를 조직의 자산으로 만든 가장 구체적인 사례다.